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오지마 전투 (문단 편집) == 기타 == * [[너희는 죽으면 야스쿠니에 간다]]에 수록된 증언에 따르면, 1944년 12월에 임관을 앞두고 있던 해군병과예비학생들은 이오 섬으로 배치되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다고 한다. * 천여 명의 해군 소속 [[조선인]] [[군무원]]들도 전투에 휘말려 숨졌다. 비행장 등 섬 내 해군 시설 건설을 위해 입도했던 조선 군속들은 전투가 시작되자 전투원으로 취급되었고, 태반이 전사하였다. 1945년 3월 9일 자 서일본신문에서는 '''반도 용사도 돌격'''했다는 제하로 이들의 옥쇄를 보도하였다. 육군 소속으로는 지원병 출신으로 재소집되어 전사한 22명을 비롯한 137명의 조선인 군인 및 군속들이 이오지마에서 전사했다. * 이오지마 전투에서는 총 '''27명'''의 장병들이 [[명예 훈장]]을 수여받았다. 해병대 23명, 해군 4명에게 수여되었으며 이 중 13명은 사후 추서되었다. [[제2차 세계대전]] 기간을 통틀어 해병대에서 수여받은 명예 훈장이 82명인데 약 '''28%'''의 비율이다. 심지어 전사자들 중에는 [[더 퍼시픽]]의 주인공으로도 잘 알려진 [[존 바실론]] 중사처럼 이전에 [[명예 훈장]]을 받고 다시 실전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사례도 있었다. 그만큼 이오지마 전투가 매우 격렬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. * 과달카날 전투의 [[존 바실론]]처럼 이오지마 전투에서도 기관총 무쌍이 등장했다. 그 주인공은 전쟁 전 공구를 제조하는 공장에서 생산직으로 근무하다 1942년 9월 22일 [[미합중국 해병대]] 예비군으로[* 미국의 예비군은 한국의 [[상근예비역]]과 유사한 제도이다.] 입대한 [[https://en.wikipedia.org/wiki/Tony_Stein|토니 스타인(Tony Stein)]] 상병으로 그는 버려진 해군 전투기에서 떼어낸 30구경 7.62mm [[M1919 브라우닝#AN/M2|AN/M2]] 경기관총에다가 [[M1918 브라우닝]]의 양각대와 [[M1 개런드]]의 개머리판으로 만든 기관총을 직접 제작한 후 스팅어(Stinger)라고 이름을 붙여 그걸로 [[일본군]] 진지들을 쓸어버렸다. 탄약이 떨어지면 탄약을 보충할 겸 부상자를 해변으로 후송하면서, 그렇게 '''8번을 왕복'''하며 전장에서 활약했다. 이 영웅적 행동으로 [[명예 훈장]]이 수훈되었다. 그는 원래 해병 중의 해병이라는 미 해병대 제3사단 제1공수연대 소속이었지만 1944년 1월 8일, 미 해병대 사령관 알렉산더 반데그리프트 해병 중장의 부대 해체 명령에 따라 이오지마 전투 당시에는 새로 창설된 미 해병대 제5사단 28연대 1대대 A중대 소총 부분대장으로 근무 중이었다. 그러나, 이오지마 전투 중인 1945년 3월 1일, 중대 척후로 19명의 해병들과 함께 정찰을 나갔다가 일본군 저격병의 총을 맞고 전사했다. * 기관총 무쌍 외에도 [[화염방사기]] 무쌍이 이 전투에서 등장했다. 그 주인공은 [[미합중국 해병대]] 제3사단 21연대 1대대에 속해 있던 [[https://en.wikipedia.org/wiki/Hershel_W._Williams|허셜 우드로 윌리엄스(Hershel Woodrow Williams)]] 상병(Corporal)이다. 1943년 미해병대에 입대하여 [[제2차 괌 전투]]에 참전한 이후 1945년 2월 21일 이오지마에 도착한 그는 이오지마에서 32kg이나 되는 화염방사기를 들고 4명의 동료들과 함께 [[일본군]] 기관총 진지들을 파괴하는 임무를 맡았다. 일본군의 기관총 사격에 그의 동료들이 모두 전사했지만 그는 포화를 뚫고 화염방사기로 일본군 진지들을 파괴해 나갔고, 화염방사기의 연료가 다 떨어지면 잠시 후퇴해 연료통을 교환하고 다시 진지로 돌격하는 전략을 '''4시간 동안 반복'''해 총 '''7개의 진지들을 파괴'''했다. 이 활약을 인정받아 전후 1945년 10월 5일 [[백악관]]에서 [[해리 S. 트루먼]] 대통령에게 [[명예 훈장]]을 수여받았으며 명예 훈장 수여 이후에도 1969년 [[준위]]장 4호(CW4)로 전역할 때까지 미 해병대에 복무했다. 이오지마 전투를 넘어 [[제2차 세계 대전]]에서의 활약으로 명예 훈장을 받은 참전자들 중 [[마지막 생존자]]이기도 했던 그는 전역 이후에도 [[강연]], [[비영리 단체]] 우디 윌리엄스 재단(Woody Williams Foundation) 설립 등 현역·퇴역 군인들을 위해 다양한 곳에서 활동했다.[* [[슈퍼볼 LII]]에 참석하여 명예 훈장 수여자들을 대표하여 [[https://www.youtube.com/watch?v=b2eGqQFlxSM|심판, 선수들 앞에서 코인 토스]]를 하기도 했으며, 2020년 3월에는 본인의 이름이 붙은 [[원정이동기지선]] [[https://en.wikipedia.org/wiki/USS_Hershel_%22Woody%22_Williams|USS 허셜 "우디" 윌리엄스 호]]의 취역식에 참석하여 [[https://youtu.be/9Cib21-U-MA?t=3213|수병들 앞에서 연설]]을 하기도 했다.] 2021년 [[https://www.youtube.com/watch?v=_E7nTKhviEo|증손자가 자신을 뒤이어 미 해병대 훈련소를 수료하는 것]]을 지켜본 후 현지 시간으로 2022년 6월 29일, 98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. [[https://twitter.com/USMC/status/1542177729906442241?cxt=HHwWgoC8ua-e9eYqAAAA|#]] * 이오지마가 점령됨으로 인해 [[미국]]은 [[일본]] 본토를 공습할 [[B-29]]의 최전방 기지이자 피격기, 혹은 재보급기와 호위 전투기를 위한 중간 기착지를 얻게 되었고, 점령 이후 본격적인 [[일본 본토 공습]]을 가하게 된다. 미군의 이오 섬의 확보는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, 이오지마 점령 이후 오키나와 공략 전 전진 기지의 획득과 함께 기존에 [[티니안]]이나 [[사이판]], [[괌]]에서 B-29 폭격기의 항속 거리 문제로 인한 폭장량의 제한이 점차 완화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포함하여 손실되는 B-29 폭격기나 승무원의 희생이 줄어들게 되었고[* 영화 아버지의 깃발을 보면 이에 대한 언급이 등장한다. 미군이 이오지마 섬을 함락한 직후, 곧 엔진이 파손된 B-29 폭격기가 연기를 내뿜으며 간신히 착륙하는 장면이 등장한다. 실제로는 비행장 남북에서 전투를 벌이는 그 긴박한 상황에 파손된 B-29가 착륙한 것이 첫 번째이다. 전투중인 비행장에 착륙할 정도로 이오지마 비행장은 대체불가였다.], 일본군의 입장에서는 폭격기의 공습을 경고해줄 수 있는 경보망이 무너져 버려 본토 폭격의 피해를 고스란히 뒤집어쓸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리게 된 것이다. 특히나 단순한 기체이상이나 연료문제로 중간기착하는 사례뿐 아닌, 대공공격을 받아 피격 및 기체 고장으로 불시착해야했던 수많은 폭격기들이 이 섬을 믿고 작전을 좀더 공격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으며, 미 육군항공대 추산으로 이오지마 비행장에 불시착한 B-29 폭격기 승무원 24,000명 중 절반인 12,000명은 이오지마가 없었더라면 살아남을 수 없었다. 이 섬은 수많은 군인의 목숨을 희생한 대가로 수많은 군인의 목숨을 구했다.[* 커티스 르메이는 이오지마의 전투 상황을 듣고, "이제 우리 B-29 항공대가 해병대가 흘린 피에 보답할 차례다."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. 이오지마 공략을 가장 강력하게 요구한 육군 항공대 장군이 바로 커티스 르메이였기 때문.] 이오지마 전투에서 상륙한 해병대원들이 입은 엄청난 피해 때문에 이오지마 전투의 의의에 대해 회의감을 가지는 입장도 존재한다. 하지만 해병대원의 희생을 대가로 비용/전력을 확보했다는 반론도 있다. 이오지마는 일본 본토를 폭격하는 데 필수적인 전략 거점이라는 점도 있고 본토 상륙에 교두보를 얻는 동시에 진격할 때 뒤통수를 맞지 않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점령했어야 한다는 의견이 대다수이다. 처음부터 핵을 쏘지 않는 한 통상 작전으로는 반드시 공략해야 했을 것이며 애초에 미국이 가지고 있던 핵조차 몇 개 없었던 데다 [[도쿄 대공습]]의 위력이 핵보다 강했으나 버텼던 것을 보면 미국 입장에선 핵은 도박수였다. 그러니 소련의 대일전 참전을 본격적으로 요구하기 시작한 것이 이 때다. 이오지마는 사실은 일본에도 최대 요충지였는데, 이오지마는 사이판, 티니안, 괌에서 발진하는 폭격기가 지나갈수 밖에 없는 위치에 있어 폭격기를 쉽게 감시할 수 있었지만, 이 경로에서 유일하게 항공기를 띄울 수 있었던 활주로가 있던 이오지마를 뺏기자 의지할수 밖에 없는건 감시정과 [[이즈 제도]], [[오가사와라 제도]] 밖에 없었고 이들중 어디에도 요격기를 띄울 수 있는 활주로를 만들 섬이 없었다.[* 이오지마보다 면적이 더 넓은 섬은 치치지마등 몇군데 더 있지만, 모두 섬의 지형상 활주로를 만드는 것이 불가능했다.] 그때문에 항공 정찰능력이 사라진채 수상 정찰에만 의지해야 했는데, 이미 제해권과 제공권을 전부 뺏긴 상태에서 일본 감시정들은 어선같은 민간선을 징발한 수준이라 미 잠수함들에게 속절없이 사냥 당했고[* 당시 얼마나 상황이 절망적이었냐하면 마지막 남은 항행 가능한 전력조차 야마토와 세트로 오키나와에서 자살특공으로 수장시킨 이후 연합함대는 아예 띄울 배가 없는 수준이었고 4월달부터는 연안이 기뢰밭이 되어 기껏해야 가이텐 정도만 띄울 수 있는 수준이었다. 사냥감에 비해 태평양에 배치된 미국 잠수함이 너무 많아서 미국 잠수함은 메달이라도 하나 따자는 식으로 온 태평양을 휘젓고 다녔다.] 오가사와라 제도와 이즈 제도는 그래도 감시정들보단 나았지만 섬이라 그냥 우회해 버리면 그만이고, 발견이 돼도 B-29의 최대속도 574km/h를 생각하면 거의 뒷북 수준의 경보를 보내는 것이라서 조기경보망 자체가 일거에 무너졌다. 사이판이 함락되어 B-29가 도쿄를 일직선으로 공략가능한 항로가 만들어진 가운데 그나마 유일하게 눈에 걸리던 이오지마까지 넘어갔으니 B-29는 그야말로 사이판에서 도쿄로 출퇴근하듯 아무런 긴장감 없이 일본 열도를 휘저을 수 있었다.[* 오죽하면 통신보안에 그렇게 철저한 미군이 이오지마 이후 B-29에 대해서만큼은 통신보안이 널럴해서 일본 통신감청반이 B-29의 작전목표를 5시간 전에 미리 듣고 보고하는데도 폭격을 전혀 막지 못했다.] * 한편 이 전투의 처절함에 빗대어 [[이글루스]]의 [[이오공감]]을 이오지마라 부르곤 했다. 비꼬는 의미이다. 이오공감이 사라지면서 이 말도 자연스레 쓰이지 않게 되었다. * 현재 이오지마가 1달에 10cm라는 급속도로 융기하면서 당시 침몰한 미군 상륙정들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고 한다.[[https://youtu.be/DXp8rcXXdcY|#]] 인근에 해저화산이 분화하는 등 화산활동의 영향으로 추정된다. * [[에식스급 항공모함]] 중 CV-46 이오지마가 취역할 예정이었으나, 취소당했다. 대신 전후에 [[이오지마급 강습상륙함]]이 취역했고, 퇴역 후엔 [[와스프급 강습상륙함]] 7번함 LHD-7에 명명되어 현재 현역이다. * 관련 영화들로는 [[이오지마에서 온 편지]]와 [[아버지의 깃발]]이 있다. * 전투에 참가했던 미 해병대원 랠프 이그나토스키(Ralph Ignatowski)[* [[아버지의 깃발]]에서 이기라고 불리는 실존인물이다.]는 일본군에게 붙잡혀 살해당했는데 두개골이 박살나고 두 팔이 절단되고 눈이 뽑히고 성기가 절단되는 등 끔찍하게 훼손된 모습의 시신으로 발견되어 미 해병들의 분노를 샀다. 그의 시신 옆에는 또 다른 해병대원이었던 레너드 소콜(Leonard Sokol)의 시신도 있었는데 그의 시신 역시 비슷한 모습으로 끔찍하게 훼손되어 있었다. 소콜의 경우 살해된 뒤 시신이 훼손된 것이 확실하지만 이그나토프스키의 경우 신체훼손의 고문을 당한 뒤 살해[* 브래들리의 묘사에 따르면 여러번 총검에 찔려 살해되었다. 피가 난 자상과 나지 않은 자상이 여러군데 몸에 보였다고 묘사했다.]된 것인지 아니면 살해된 뒤 시신이 훼손된 것인지 의견이 분분하다. 그가 당한 신체훼손은 모두 치명상이므로 이미 살해된 후에 시체가 훼손되었을 가능성이 조금 더 높다. 어찌되었든 간의 전쟁의 광기와 잔악함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시이다. * 아시아 유일의 [[승마]] 금메달을 [[1932 로스앤젤레스 올림픽]]에서 받은 니시 타케이치 남작도 이 전투에서 죽었다. 1932년 당시 중위였던 그는 금메달을 받아 대위로 진급했으며 , 1943년 중좌로 진급하여 이오지마에 배치했다가 이 전투에서 42세 나이로 죽었다. * 종전 이후 첫 번째로 세워진 성조기와 스리바치 산에 세워진 깃발들은 후술할 미 해병대 전쟁 기념관에 소장되어 전시되고 있다. ||[[파일:354448505_4eedda37f1_b.jpg|width=100%]]|| || '''이오지마의 깃발''' [* 사진은 이오지마의 깃발으로 유명한 두 번째로 세워진 성조기이다. 전투 도중, 스리바치 산의 돌풍으로 인해 깃발 일부분이 훼손되었다고..] ||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